아끼지 말 것

새 연필을 깎을 때

유구한 2020. 4. 11. 01:20

 

 

 

 

 

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색연필을 구입했다.
일반 연필보다 가벼운 이 색연필은 떨어뜨리기도 무섭고 칼로 깎을 때도 조심스럽다.

연필깎이에 넣고 몇 번만 손잡이를 돌돌 돌리면 쉽고 빠르게 뾰족한 연필 끝을 만날 수 있다. 하지만 나는 이 가벼운 색연필을 조심스럽게 들고 조금씩 칼로 깎기 시작한다. 칼로 깎다 보면 내 힘으로 색연필이 반 토막이 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머릿속, 손끝을 휘감는다. 그 불안감을 꼭 쥐고서도 손으로 연필을 깎는 이유는 뾰족하게 깎여나가는 심이 너무 아깝게 느껴져서이다. 결국 쓰다 보면 뭉툭한 연필 끝은 내 의도와는 다른 선을 만들고 또렷함보단 흐릿함만을 준다. 필요에 따라 연필 끝을 뾰족하게 깎아야 하지만 그 조그마한 가루조차 아까워 끝내는 불편함을 감수하려고 한다. 조금씩 쓰다가 새것의 흔적이 사라지면 결국 뭉툭한 연필 끝이 싫어서 끝을 뾰족하게 다듬기 시작할 텐데도 불구하고 첫 시작은 늘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한다. 

 

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이다.

연습장의 첫 장은 쓰지 않고 하얗게 비워두는 것, 똑같은 연습장, 연필, 샤프, 필통 지우개 등이 2개 이상이어야 사용이 가능한 것 같은. 좋아하는 것은 기분에 따라 늘 달라지고 아끼던 물건의 순위도 항상 같을 수 없어 어떨 땐 막 사용했다가도 어떨 땐 막 사용했던 순간조차 아까워지는 괴로운 습관. 

 

시작은 뾰족하고 끝은 뭉툭하게, 모든 물건들이 내 손길이 닿아 변해가는 순간들을 아까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. 의미 있게 사용되고, 사용되기에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니까.
그렇지만 늘 그렇듯 머리와 손은 따로놀고있다.